[영화 추천] 차가운 현실을 담은 따뜻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평생을 목수로 살았다. 성실이 일했고 납세의 의무를 다한 시민이자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았던 이웃이다. 부자는 아니었을지 모르나 부족함 없이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십 년 가까이 투병을 하고, 자신도 심장질활을 겪자 집세도 못 낼 정도로 형편이 나빠졌다. 소시민이었던 그가 빈곤층으로 내려앉는 건 금방이었다. 다니엘 작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질병수당을 신청한다. 하지만 관계기관은 지극히 형식적으로만 댄의 상태를 심사한 결과 부적격 판정을 내린다. 이에 다니엘은 고용센터를 찾아가 실업수당을 신청한다. 그러나 이 또한 다니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시퀀스를 통해 영화는 진짜 복지가 필요한 이들에게 무용한 복지기관의 실태를 보여준다. 관계기관의 모든 업무는 컴퓨터로만 이루어져서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다니엘 같은 사람은 막막할 수밖에 없다.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고용된 직원들은 원칙만을 내세우면 지극히 기계적이고 사무적으로만 민원인을 상대한다. 다니엘이 무사히 수당을 받을 수 있을까.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은 국가를 위해 의무를 다한다. 의무를 다하는 국민에게 국가는 권리를 준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생활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권도 국가의 의무 중 하나다. 그러나 국가는 의무를 다하는 시민에게 의무를 다하는가. 영화 [나, 다니엘블레이크]가 현실을 오롯이 반영하고 있다면 적어도 영국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우여곡절을 겪은 다니엘은 실업수당 신청에 성공하지만 건강문제 때문에 구직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결국 실업수당도 반려된다. 건강문제로 질병수당을 신청하면 충분히 건강하니 실업수당을 신청하라고 하고, 실업수당을 신청하면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질병수당을 신청하라는 복지제도의 부조리와 모순의 늪에서 국가에 의무를 다했던 한 시민은 생존의 위협에 내몰리고 방치된다.
영화는 싱글맘인 케이티를 통해서도 한 가장과 그의 가정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빈곤의 늪에 빠지는지 잘 보여준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케이티는 어렵고 힘든 현실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보려 한다. 그러나 복지가 시급한 케이티는 복지수당 40퍼센트를 삭감당한다. 복지센터 출석에 조그 늦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에 케이티와 두 자녀는 끼니를 굶을 만큼 빈곤에 내몰린다. 케이티는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구해보려 하는데, 그를 받아주는 곳은 매춘뿐이다. 케이티는 자신과 아이들의 생존을 위해 끝내 몸을 판다.
가난에도 종류가 있지 않을까. 게으른 가난과 성실한 가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이의 가난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가난하게 되는 건 문제가 아닐까. 문제의 원인이 개인이 아니라면 사회의 구조가 그 원인은 아닐까.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는 영화다. 다니엘도 케이티도 게으르지 않았다. 다니엘은 평생 성실히 살았고 납세의 의무를 다했다. 케이티도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의무를 다하는 소시민에게 국가가 의무를 다했다면 이 영화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만들어지고 시사회에서 십 분 넘게 기립박수를 받은 것은 슬픈 일이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헙 번호 숫자도 컴퓨터 화면 속 깜빡이는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평생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복지가 시급한 시민에게 복지는 언제나 늦다. 질병수당 재심을 위해 다니엘이 준비한 변론서는 유서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