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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한 걸음부터 <베이비스텝> 테니스 애니 추천

베이비 스텝

 

[베이비 스텝]은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장장 10년 동안 소년 매거진에 연재된 동명의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작품이다. 포스터에서 알 수 있듯이 주제는 테니스. 스포츠는 만화의 주요 소재지만 스포츠를 학문적으로 접근하거나, 아니면 단지 환타지로만 소비하거나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상이하다. 어느 작품에선 두 요소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기도 한다. [베이비 스텝]은 전자에 속한다. 작품이 다루는 테니스 지식은 입문교양서로 활용해도 될 만큼 깊고 풍부하다. 그렇다고 만화 장르로서의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환타지 요소는 거의 없지만 아기가 걸음마하듯 성장해나가는 주인공을 내세워 테니스라는 주제를 현실적으로 깊이 있게 파고들면서 지적인 재미와 흥미의 균형추를 맞췄다.

 

작품의 주인공은 마루오. 그에겐 운동선수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선척적인 재능이나 신체능력은 없다. 체력도 평균 이하. 하지만 그에겐 어릴 적 퇴근하는 아버지를 보기 위해 집앞을 지나가는 전철을 바라보다 갖게 된 평균 이상의 동체시력이 있었다. 그러나 동체시력은 마루오만 가진 재능은 아니다. 누구나 단련하면 어느 정도 레벌까지 키울 수 있고 일류 운동선수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기본 기술인 것이다. 마루오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 줄 치트키는 아니라는 것. 테니스 선수로서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모순적이게도 노트 필기였다. 마루오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 공부는 그저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고 이왕이면 잘 하고 싶은 일이었다. 보통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진 마루오가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필사적인 필기뿐이었다. 그래서 마루오는 언젠가부터 필기를 시작했다. 필기 덕분에 마루오는 늘 좋은 성적을 받았고 중학생 3년 내내 올 A를 놓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그의 필기는 예술로 승화했고, 그의 노트는 동창들 사이에서 명물이 되었다. 이렇듯 공부밖에 모르던 마루오가 왜 테니스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본격적인 수험공부를 위한 체력단련. 수험체력을 높이기 위해 여러 운동을 물색하다 그저 유연히 테니스가 얻어 걸린 격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마루오는 테니스를 하면서도 배우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노트에 꼼꼼히 필기했다. 심지어 시합에서 게임과 게임 사이 잠시 가지는 브릿지 시간에도 필기를 했다. 방금 경기에 자신과 상대 선수가 친 공의 구종과 궤적은 물론 자신과 상대의 크고 작은 심리변화와 실수까지도 빼곡히 적었다. 언뜻 운동과 무관해 보이는 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테니스 선수로서 마루오가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오랜 기간의 필기로 단련된 기억력과 관찰력, 판단력과 분석력은 마루오의 부족한 신체 능력을 상쇄하는 것이다. 테니스를 배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루오의 노트는 늘어나 그의 가방에 차곡차곡 쌓였다. 노트들이 빼곡한 가방의 부피는 마루오의 치열한 노력과 철저한 자기 관리의 산물에 다름 아니었다. 마루오의 성실한 노력과 고된 훈련이 맞물리며 마루오는 빠르게 성장한다.

 

이렇듯 [베이비 스텝]은 천재성과 재능을 중시하는 기존 스포츠 만화의 클리셰와 결을 달리한다. 많은 스포츠 만화에서 꿈 없이 방황하던 주인공이 운명적으로 특정 운동을 만나 자신의 천재성을 깨닫고 각성을 거듭하며 성장하는 데 반해, [베이비 스텝]은 이 클리셰를 의도적으로 비튼 느낌이다. 가정과 학교에 아무 문제가 없고,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르며 공부도 탑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자 평범한 신체 능력의 주인공이 오로지 분명한 목표 의식과 철저한 자기관리, 그리고 치열한 노력만으로, 아기의 걸음마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꿈에 다가간다는 스토리가 신선하다. 아마도 작가는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앞에서 주저하는 이들에게 용기 내어 베이비 스텝을 떼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현실은 녹록하지 않겠지만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보면 어느새 꿈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만화 속 인물들이라지만 꿈을 향해 자신의 전부를 걸고 모든 걸 쏟아내는 마루오와 다른 선수들을 보면서 대충대충 살아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되돌릴 수 있다면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남이 좋아하는 일 말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것에 내 전부를 쏟는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어떤 일을 시작해도 조금만 힘들거나 흥미가 사라지면 손바닥 뒤집듯이 접었다. 지금의 그저 그런 현재는 그저 그렇게 살아온 과거의 결과일 테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베이비스텝을 뗀 다면 나의 내일은 달라질까. 더 늦기 전에, 진짜 늦어버리기 전에 뭐라도 시작해야 할 텐데, 그 시간에 나는 50편이 넘는 [베이비 스텝]을 정주행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