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영화추천 봉준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무겁고 어두운 현실을 사는 모두의 이야기

[플랜더스의 개]는 '위다'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영국 작가가 1872년에 발표한 아동 문학이다다. 통속 연애소설을 주로 써왔던 위다는 [플랜더스의 개]를 기점으로 다양한 사회문제와 예술적 요소를 자신의 작품에 녹여냈다. 이 작품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과 가난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그리고 빈부격차의 문제를 넬로와 주변인물들을 통해 그려냈다. 봉준호의 [플란다스의 개]는 분명 원작과는 무관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엇비슷한 사회문제를 풍자한다. 원작의 내용과 무관한 영화에 동명의 제목을 붙인 걸 보면 위다의 원작이 영화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윤주와 현남의 만남과 헤프닝을 그린다. 아파트는 획일화되고 수직 서열화된 한국 사회의 단면이다. 밑으로는 떨어지기 쉬워도 위로는 올라가기 힘든 기형적 사회구조의 상징. 그 폐쇄성을 전달하려는 듯 아파트를 잡는 샷은 매번 일말의 여백 없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윤주는 이 아프트 중간층에 사는 고학력 백수이다. 중간층은 윤주의 어중간한 사회적 위치이기도 하다. 상류층에 입성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은 교수가 되는 것뿐인데, 백 없는 윤주는 번번이 미끄러진다. 자질이 부족하거나 자격이 없어서는 아니다. 교수 자리를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교수가 될 줄 알았던 윤주에게 현실은 너무나 부조리했다. 그런 현실을 바꾸기엔 힘이 없고, 교수 자리를 사기엔 돈이 없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는 윤주의 무기력과 무력감이자 흙수저나 동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의 공통된 정서다.

 

현남도 만성 무력감에 찌든 인물이다. 상고를 졸업한 현남은 변변찮은 직장을 전전하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격리 일을 하고 있다. 현남의 근무 태도는 태만 그 자체이다. 열성도 없고 툭하면 자리를 비운다. 이런 현남도 사회 초년생 적에는 꿈도 있고 열정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달랑 고등학교 졸업장 하나만을 가진 현남에게 현실의 벽은 높고 두터웠을 것이다. 벽에 자꾸 부딪히다보니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닳고 닳은 모습이 역력하다. 남들 다 하는 연애도 못하고 그렇다고 삶의 낙이 있는 것도 아닌 채로 무미건조한 일상을 그저 관성으로 살아간다.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처지가 비슷한 친구 장미. 수시로 장미가 알바를 하는 문방구에 찾아가 농땡이를 피우며 힐링의 시간을 갖는다. 현남에게 지긋지긋한 현실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은행 강도를 잡아 유명해진 은행원처럼 세상이 놀랄 만한 일의 주인공이 되는 것뿐.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판타지를 꿈꾸는 현남이 낯설지 않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상에 사는 윤주와 현남의 접점은 개 '삥돌이'이다. 윤주는 처음엔 개 짖는 소리가 거슬려서 충동적으로 개를 납치했지만, 나중엔 욕구불만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개를 죽인다. 현남은 개 납치범을 쫓지만 그렇다고 어떤 사명감이나 정의감에서 그러는 건 아니다. 예의 은행원처럼 개 납치범을 잡아 유명해지고픈 판타지 때문입니다. 윤주는 악이라기엔 소심하고, 현남은 선이라기엔 불순하다. 순수 선도 악도 아닌 윤주와 현남의 얼굴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까.

 

윤주도 아내의 퇴직금으로 그토록 바라던 교수가 되었지만, 강의실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그의 얼굴은 시종일관 어둡고 무겁다. 떳떳하지 못한 과정으로 교수가 되고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개를 죽인 일이 찜찜함으로 남아 있어서일까. 윤주는 관객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고개 숙인 지식인의 모습이다. 현남도 개 납치범을 잡아 자신의 판타지를 이루었지만 단발성 이벤트에 그쳤다. 아파트 지하에 숨어 사는 부랑자가 단지 내의 개를 훔쳐 먹었다는 이야기는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변두리 아파트 관리실에서 일하는 경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방송국에서 나와 인터뷰까지 했는데, 통으로 편집되었다. 유명해지기는 커녕 이런저런 사유로 관리실에서 해고당했다. 현남은 또 어디서 비슷한 직장을 전전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높은 곳을 향한다. 한 번 말석을 차지하면 그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움켜쥔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남을 밟는다. 그 와중에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받기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합리화한다. 그렇게까지 해서 어느 정도 위치에 도달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주변에 살만큼 사는 사람은 있어도 스스로 행복하다는 사람은 드물다. 애초에 행복은 무엇일까? 이렇게 사는 게 답이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플란더스의 개]는 아무것도 가려쳐주지 않는다. 암울한 현실만 보여준 게 멋적은 듯 산으로 소풍을 떠난 현남과 장미를 비추지만 무위자연 무위도식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